가깝고도 먼 어떤 삶의 경지 (빌 브라이슨 – 나를 부르는 숲)


 

 

이미지 13. 2. 7. 오전 12.35

 

 

 

 

 

 

 

 

 

 

  지난해 봄 굴업도를 시작으로 휴양림과 백두대간 산천초목을 배회하며 캠핑의 매력에 푹 빠져 살다가 이리도 지독한 겨울을 나느라 캠핑을 못하던 아니 안하고 있던 찰나에, 생각지도 못했던 2월에 접어드니 다시 산과 계곡 속으로 들어가 청량함에 파묻혀 밤을 지새고픈 욕구가 충만하다.

  늘 여유가 품에 배어있던 아주 훌륭한 후배 친구가 내게 쥐어주었던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읽으며, 잠시나마 산과 가까이 마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기행문학의 현대적 고전이란 그럴듯한 수식어가 웬지 모를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지만, 몇장을 넘기지 않아 빌 님의 매력적인 문체와 호흡, 그리고 통찰에 푹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매순간 사로 잡았던 여러 대목들 가운데, 오랫동안 담아두고파 남겨본다.

 

나무는 덩치에 비해 상당히 민감한 존재다. 내부적인 생명은 오로지 껍질 바로 안쪽의 종이만큼 얇은 3개의 조직층, 즉, 체관부, 목질부, 형성층 안에서만 존재한다. 이것들은 나무의 가운데 죽은 부분인 적목질을 둘러싸고 있는 수관을 함께 이루고 있다. 얼마나 크게 자라든 간에 나무는 단지 뿌리와 나뭇잎 사이에 엷게 퍼져 있는 몇 파운드의 살아 있는 세포에 불과하다. 이 3개의 부지런한 세포층들은 한 나무를 살아 있게 하는 모든 복잡한 과학과 공학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들의 효율성은 생명의 경이 중 하나다. 떠들썩하지도, 야단법석을 떨지 않고 숲에 사는 한 그루의 나무는 엄청난 양의 물 – 더운 날, 큰 나무의 경우 수백 갤런 – 을 뿌리로부터 나뭇잎으로 빨아올려 대기에 돌려준다. 소방서에서 그만한 양의 물을 빨아올리기 위해 기계를 가동할 경우 생겨나는 소음과 소동, 그리고 혼란을 상상해보라.

물을 빨아올리는 것은 체관부와 목질부, 형성층이 하는 일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들은 목질소와 섬유소를 만들어내고 타닌산과 수액/고무/기름/진의 생산과 보관을 조절하며, 광물질과 영양분을 나누어 준다. 미래의 성장을 위해 전분을 당분으로 전환 – 여기서 메이플 시럽이 떠오른다 – 한다.  그것들이 그 밖에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오직 신만이 정확히 알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 얇은 층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나무는 침투하는 유기체들에 너무 취약하다. 이것들과 싸우기 위해 나무들은 정밀한 방위 체제를 갖추어 왔다.  고무나무의 껍질을 벗기면 유액이 나오는 것은, 벌레들이나 다른 유기체들에게 “별로 맛없어, 너희들이 먹을 만한게 하나도 없어.  저리 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무들은 모충처럼 파괴적인 생물들을 저지하기 위해 모충의 식욕을 떨어뜨리는 타닌산으로 잎을 덮어 모충에게 딴 데를 알아보도록 한다. 침략이 심각한 상황일 경우, 일부 나무들은 그 사실을 전하기도 한다. 참나무의 몇몇 종들은 근처의 다른 참나무에게 공격이 임박했다는 걸 알리는 화학물질을 방사하기도 한다. 인접한 참나무들은 이에 호응하여 다가오는 도살을 막아내기 위해 타닌산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물론, 자연은 그렇게 작동한다. 문제는 나무가 자연이 가르쳐주지 않은 새로운 적을 만났을 때다. 엔도시아 파라시티카의 습격을 받은 아메리칸 밤나무는 가장 극명한 사례다. 그것은 손쉽게 밤나무 안에 파고들어 형성층을 먹어치운 뒤 나무가, 화학적으로 말해서 그것의 존재에 대해 손톱 끝만큼이라도 파악하기 전에 또 다른 나무를 공격할 태세를 갖춘다. 그것은 한 자벌레당 수백만 개가 나오는 포자를 타고 전파된다. 단 한 마리의 딱따구리는 나무 사이를 딱 한 번 오갈 때 수억 개의 포자를 옮긴다. 아메리칸 밤나무의 병충해가 심할 경우에는 바람이 숲을 지날 때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조 단위의 치명적인 포자들이 안개 속을 떠다니게 할 수 있다. 치사율 100퍼센트! 35년 만에 아메리카 밤나무는 기억으로만 남았다. 애팔래치아 산맥 한 군데서만,  한 세대 만에 모든 나무의 4분의 1인 40억 그루를 잃었다.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이걸 생각해보자. 이런 질병들은 특수한 종에만 전염되었다. 밤나무마름병이나 더치참나무병 또는 층층나무탄저병 대신에 하나의 나무마름병 – 무차별적이고 모든 삼림을 휩쓸어도 저지할 수 없는 뭔가 – 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사실, 있기는 하다. 산성비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자. 여러분이나 나나 한 장에서 과학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말자. 그래도 이것만은 간직하자. 애팔래치아 숲을 지나갈 때마다 거기에 서 있는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는 것을.

(중략)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하루에 24~26킬로미터를 주파했다. 이전에 우리가 38킬로미터씩 주파할 수 있을 거라고 들은 것과는 달랐지만, 우리 기준에서 보면 상당한 거리가 분명했다. 나는 용수철 같이 경쾌하게 걸었고, 몸 상태도 좋아져 수년 만에 처음으로 배의 모습이 커다란 공 같지 않아 보였다. 지루한 일과가 끝나고 몸이 뻐근해지는 현상은 여전했지만, 통증이나 물집이 내 존재의 일부분이 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거의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매번 사랑스럽고 깨끗한 마을을 떠나 산으로 들어갈 때마다 단계별 변환 – 지저분함 속으로 우아하게 안착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변환을 할 때마다 전에 그런 경험을 전혀 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빌 브라이슨 – 나를 부르는 숲 중에서 발췌)

 

  나는 빌 님이 위에서 언급한 그러한 상태가 내게 주어진 더 많은 순간들을 채워주길 바란다. 내가 대하는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고, 늘 현재의 조건과 상황을 탓하지 않고 충실하며 만족할 줄 알며, 길고 장대한 도전을 지속해 가는 자세.. 를 갖추고 살기를 바란다. 어쩌면 평생을 다해 지켜내야 할 큰 목표라고도 볼 수 있겠다. 조금만 더 욕심을 내자면, 내가 만나고 나누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러한 삶을 이루어 내고 싶다. 아- 신록이 가득한 숲으로 얼릉 달려 가고 싶네.